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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려고 쓰는 문화예술이론) 퍼포먼스학이란? Victor Turner, Dwight Conquergood, and Richard Schechner 본문

비평/Fall 2021 Intro to Performance Studies

내가 보려고 쓰는 문화예술이론) 퍼포먼스학이란? Victor Turner, Dwight Conquergood, and Richard Schechner

가로이 2021. 9. 14. 10:05

우리나라에서는 퍼포먼스학, 공연학이라고 하면 주로 연극영화과 속의 일부로만 다루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미국에서는 전통적인 연극학의 대안으로서 퍼포먼스학이 등장한지가 꽤 되었는데, 

1979년 리차드 쉐크너 (Richard Schechner)를 비롯한 학자들이 제가 다니고 있는 뉴욕대학교에 공연학부를 설립하면서 시작되어 노스웨스턴 대학교, 조지타운 등 꽤 많은 대학들에서 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퍼포먼스학은 과연 무엇일까요?

'퍼포먼스', '공연' 하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말 그대로 무대에서의 연극, 뮤지컬, 댄스를 비롯한 show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넓게는 '수행되어지는 (to perform) 행위'를 말해요. 거리극, 시위, 축제, 의례부터 일상 속에서 우리가 수행하는 모든 일련의 행위들 (Performance of Everyday Life)이 모두 퍼포먼스가 될 수 있죠. 그래서 퍼포먼스학은 인류학(Anthropology)으로부터 시작되었어요. 띠용...🙃

오늘 저는 퍼포먼스학의 기초 이론과 필요성을 다룬 세 개의 페이퍼들을 소개해볼건데요, 먼저!

Victor W. Turner (빅토르 터너)<Betwix and Between: The Liminal Period in Rites de Passage> 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리미널리티(liminality)라는 개념이에요. 

liminality, rites de passage, betwixt and between는 어떤 사이의, 중간지점의 기간으로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진입한 neophytes(초심자?)들이 과거의 상태(state)에서 현재의 새로운 문화로 되어지는, 변화하는 과정 (interstructural situation, a state of progressive movement)을 뜻해요. (removed, secluded, darkened, hidden, without rank or insignia)

여기서 state(상태)는 한 개인이나 그룹이 특정 기간동안 보여주는 육체적인, 정신적인, 감정적인 상태 전반을 의미하는데요, 사회/문화 구조 속에서 분리(separation), 여백(margin), 집합(aggreagation)의 단계를 거치는 transition 과정 속에서 변화되죠. 처음 변화의 구간, rites de passage로 들어간 개인/그룹은 구조적으로 '죽었다(motionless)', '묻혔다(buried)', naked, vulnerable 이라는 형용사로 묘사되어요 (The metaphor of dissolution).

"During this period of transition between states symbolic themes characteristically concern death and decomposition."

그렇기 때문에 리미널리티는 많은 경우 죽음이나 자궁, 그림자, 일식/월식, 무덤과 같은 부정적이고 어두운 이미지로 표현되는데요, 동시에 그 과정 속의 변화하는 존재 (transitional being)은 아무런 status/insignia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not yet classified, un-structured, invisible) 물리적이지만 사회적인 현실성 (social reality)이나 혈연관계, 계급, 세속적 옷차림, 성별, 재산, 그 어느 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androgyny (남성성과 여성성의 통합) / sexlessness, 태아 (embryo), 구조적으로 죽은 사람이나 다름 없다는 것이죠.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정 후에는 새로운 패턴으로의 변화(reborn)가 반드시 동반된다는 점이에요. 

"Undoing, dissolution, decomposition are acoompanied by processes of growth, transforamtion, and the reformulation of old elements in new patterns."

학부에서 <The Square> 이라는 영화를 보고 '모라토리엄'(moratorium)이라는 개념을 배운 기억이 나네요. 

“The Square is a sanctuary of trust and caring. Within its boundaries we all share equal rights and obligations.” (The Square, 2017)

영화 시작지점에 이런 인용구가 등장하는데, 이 square를 모라토리엄으로 연결지어 해석하는 퍼포먼스 작업을 한 적이 있어요. 모라토리엄은 원래 경제 용어로 '지불 유예 기간'을 의미하는데, 사회학에서는 청년과 사회인 사이 지점에서 자기가 확립되어 있지 않은 미성숙의 상태로 사회로 나가는 것을 유예하는 현대 사회의 현상으로 이 용어를 사용해요. (저도 모라토리엄 속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는 중...) '중간 과정' 이라는 면에서 리미널리티와 비슷한 개념이라 떠올랐는데, 리미널리티 개념에서 중요한 것은 이 과정을 통해 transformed 되어 새로운 존재(new achieved status)가 된다는 점에서 약간 차이가 있다는 생각도 드네요. 

새로운 문화로 들어간 neophytes들은 그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elders/instructors들에게서 새로운 사회/문화적 상태를 학습하게 되는데요, 이 때 이 둘 사이는 완벽한 권위와 복종의 관계에요. 반면 neophytes들 사이의 계급은 모두 지워져서 평등하죠. 하지만 이 instructors들이 elder, 나이가 많은 사람들일 때 이 관계는 법률적으로 강제된 권위가 아니라 전통 속에서 자명하게 전제되는 (self-evident authority of tradition) 일상적인 개념이에요. 그냥 노인공경의 예의/전통 때문이지 리미날리티 속에서의 절대적인 수직관계가 아니라는 것이죠. 반대로 문화/사회 구조가 개인에게 강제하는 전통의 예시가 있다면 북아메리카 인디언 Omaha 부족의 남자 아이들이 받는 의식을 들어요. 이 소년들은 소년에서 남성으로 변화하는 리미널리티의 과정에서 mixuga라는 존재가 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일정 나이가 되면 혼자서 바깥 생활로 던져졌을 때, 여성들이 사용하는 약간 지게?같은 burden-strap을 받는 꿈을 꾸게 되면, 여성으로 살아가는 또 다른 존재가 돼요. 노인공경의 경우와는 다르게 리미널리티 상황 속에서 전통이라는 권위에 순종하도록 강제되는 결과죠. 또 다른 예시로 뒤에서 다루게 될 리처드 셰크너의 bemba 부족 여자 아이들의 의식이 있는데, 이 부족이 "growing a girl" 여자 아이를 성장시킨다, 라고 말하는 것의 의미는 여자 아이들이 생리를 시작해 비로소 여성이 되는 의식을 치룬다는 것이에요. 생물학적으로 성숙해지는 것이 남성과 여성으로 성장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이러한 올바른 의식의 과정을 거쳤을 때 비로소 성숙한 다른 존재가 되는 거죠. (Ontological transformation, change in being) 

neophytes/transitional beings들은 그 무엇도 아니고, 이곳에도, 저곳에도 있지 않으며 아무 곳에도 있지 않기 때문에 (betwix and between) 구조적으로 어딘가에 속해 있지도 않고, 어떤 공간이나 시간 속에서 인식되지도 않아요. 이 때 neophytes들은 본래 가지고 있던 원칙이나 새롭게 학습하게 되는 개념과 모순되는 부분들에서 갈등하면서 오염시키는 (ritually polluting) 특징을 가지고 있어요. 리미널리티를 통해 이들에게 새로운 페르소나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장치들이 필요한데, 이 때 많은 원시부족들이 그들의 문화에서 인간의 몸 일부를 과장해서 표현하거나 분리하는 등의 이미지를 많이 사용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어요. 주로 인간의 몸을 통해서 전시되거나 행동되어지는 경우가 많죠. 

"Human body is a microcosm of the universe."

주어진 문화 공동체에서 사회 전체 시스템의 가치가 표현되는 상징적인 템플릿을 sacra라고 부르는데, 그렇기 때문에 과장해서 표현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요 (frequent disproportion, monstrousness, mystery). Neophytes들은 기본적으로 수동적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새로운 nature을 받아들여야 하는 neophytes들에게 있어서는 이런 특성들이 본래 자신이 속해있던 현실과 현재의 새 문화를 뚜렷하게 분리시켜주면서 변화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에요.

요약하자면, 터너에게 의례(rituals)는 사회적으로 이미 부여받은 역할과 행동을 그저 수행하며 존재를 확인하는 ceremony의 개념과는 다르게 새로운 문화에 진입한 neophyte들로 하여금 리미널리티의 과정을 겪도록 해서 본래의 그들의 특성을 바꾸고, 또 다른 인간 존재로 바꾸는 행위라고 할 수 있어요. Ritual = transformative, Ceremony = confirmatory!

그럼 다음으로 리처드 쉐크너 (Richard Schechner)를 잠깐 살펴볼까요? 

리처드 쉐크너는 공연을 정의하는 가장 큰 특징으로 Restored Behavior을 꼽아요. 그냥 무언가를 '하는' 것과 (just doing) 공연은 분명히 차이가 있는데, 이 때 이 둘을 구분하는 것이 '전승되고 조작될 수 있는가'의 여부에요 (rearranged, reconstructed). 인과관계로부터 독립적으로 자신만의 life를 가지고 있는 일련의 행위로, '진실(truth)'이나 '원천(source)'과는 별개죠. 현실이나 진실과 모순적이거나 대립되고, 아예 아무 상관도 없을 수도 있어요. 위에서 살펴본 리미널리티와는 다르게 이러한 restored behavior은 과정이 아니라 "material", 어떠한 결과물이에요. 드라마나 연극, 샤머니즘이나 엑소시즘과 같은 의식, 춤처럼 긴 시간 동안 이루어지는 행위일 수도 있고, 단순한 제스쳐일 수도 있죠. 하지만 리미널리티 개념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의식은 한 개인을 변화시켜요 (re-becoming). 

"The behavior is separate from those who are behaving. The behavior can be stored transmitted, manipulated, transformed." 

Restored behavior의 특징 중 하나는 이 행위가 나의 내면이 아닌 나의 밖에 존재한다 (Restored behavior is "out there", distant from me)는 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이미 벌어진 경우에도 다시 행위가 수정되거나, 반복될 수 있죠 (replayed many times). 예시로 세례(baptism)를 살펴보자면, 사제가 아이의 이마에 물을 뿌리는 행위를 통해서 아이는 새로운 존재로 변화하게 되는데요, 이 때 각각의 개인들은 의식 속에서 행위자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존재이지 일상 속에서의 개인이 아니에요. 이 때 아이에게 세례를 하는 사제는 평상시 아는 아저씨일 수도 있지만, 그 의례 속에서는 Father로서만 존재하게 되는 거죠. 하지만 이 때 중요한 것은 모든 참여 주체들이 이 shared experience 속에서 그 의미를 공유하고, 동의해야된다는 거에요. 그냥 아무 아기나 붙잡고 이마에 물 뿌린다고 세례가 되는 건 아니니까용... 특정 장소에서, 올바른 옷을 입고, 합의된 제스쳐와 언어를 사용해서 행위하는 conventional process여야 한다는 것! 

"Performance is "twice-behaved behavior. People, ancestors, and gods participated in simultaneously having been, being, and becoming." 

Restored behavior의 또 다른 특징은 상징적이고 재귀적이라는 거에요 (symbolic, reflexive). 나의 자아는 다른 역할(들)을 연기할 수 있어요. 또, restored behavior은 선택을 수반해요. 내가 그 행위를 선택할 수 없다면 그건 restored behavior이 될 수 없어요. 공연성 (Performativity)의 개념을 만든 오스틴(J.L. Austin)은 무대 위의 배우들의 행위는 예외로 쳐요. 하지만 셰크너는 배우들은 어떠한 행위에도 no를 말할 수 있기 때문에 무대 위에서 배우들의 연기도 restored behavior이라고 봐요. 어떤 학자들은 동물들도 선택을 할 수 있고, 인간의 선택과 동물의 선택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셰크너는 인간은 내가 어떤 것을 선택할 수 있다는 그 느낌을 가지고 있고 그 "선택의 환상 (illusion of choice)"의 존재가 중요하다고 봐요. 의례에는 이러한 선택의 여지가 상대적으로 적지만, 연극과 공연에는 선택의 여지가 더 많죠. 공연을 위해 연습, 리허설을 하는 것은 즉흥 (rules of improvisation)의 여지를 줄이고 선택의 폭을 좁혀나가는 과정이에요. 일종의 악보(score)를 구성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죠. 모든 구성원들, 공연의 경우에는 배우와 연출, 스탭진들이겠죠? 이들이 모두 동의한 고정된 행동으 만드는 "ritual by contract", 계약을 통한 의례가 바로 공연이라고 보는 것이 셰크너의 입장이에요. 

앞에서 퍼포먼스학은 연극과 같은 무대위에서의 aesthetic theatre 뿐 아닌 일상 전반에서의 수행도 포함하고 있다고 했었는데요, 셰크너는 이런 공연 행위들이 본질적으로 같지만, 그저 그 특성만 조금씩 다를 뿐이라고 주장해요. Restored Behavior은 결국 "내가 다른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 이나 "내가 '내 옆에서 나를 보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 혹은 "내가 아님을 연기하는 것" (Performing myself)과 다름없는데요, 이 '다른 사람'이라는 것은 결국 '다른 상태의 나 (me in another state of feeling/being)' 일 수도 있어요. 여러 명의 '나'가 내 안에 존재하는 것이죠. 그 '나'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다시 경험하고 있을 수도, 꿈을 꿀 수도, 어제 내가 한 행동을 반복할 수도 있어요. 또 다르게는 '나'를 표현하는 (presentation of self)' 행위일 수도 있는데요, 어빙 고프만이라는 학자가 이 개념에 대해 잘 설명해주고 있는데 여기서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 안에 존재하는 어떤 특성들을 스스로 조정하여 특정 상황에 맞는 '나'를 보여주는 행위자로서의 '나'에요. 마지막으로 개인으로서의 '나'가 아닌 사회적, 문화적 행위자로서의 '나'도 있을 수 있겠죠? 여기서는 한 개인을 특정할 수 없고, 여러 개인들의 collective behaviors, 집단 행동을 통해서 내가 규정되기도 해요. 예를 들면 오이디푸스나 햄릿과 같은 텍스트 속의 개인들은 그 자체로 어떠한 인물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어떤 특성 전체로 대표되기도 하잖아요? 여기서 셰크너는 이것을 "a version of something" 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결국 요약하자면 Restored behavior은 어떤 개인/그룹에게 변화의 경험을 제공하는 반복되고, 수정될 수 있는 행위라고 할 수 있겠어요. 

"Restored behavior offers to both individuals and groups the chance to rebecome what they once were - or even, and most often, to rebecome what they never were but wish to have been or wish to become." 

마지막으로는 드와이트 컨커굿 (Dwight Conquergood)라는 민족지학자의 페이퍼를 소개할 거에요. 이름 맞게 한국어로 쓴 건지조차 불분명한 (한국에서) 안 유명한 그... (렇기 때문에 읽기 힘들었다는ㅎㅎ..) 

드와이트는 먼저 장소의 개념을 짚어요. '로컬'이라는 개념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아이디어와 이미지들과 자본, 상업의 역동적이고 역사적인, 때로는 트라우마틱한 움직임이라고 주장해요 (transnational circulation of images). 장소와 영역을 구분하는 boundary는 더이상 견고한 벽이 아니라 어떤 막과 같이 기능하는데, 글로벌 사회가 되면서 장소의 개념이 많이 해체되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이런 border, 국경은 그럼 현대 사회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질문하면서 페이퍼가 시작되어요. 

"what the map cuts up, the story cuts across"

사회학자인 미셸 드 셀르토 (Michel de Certeau)는 '지도'로 대표되는 공식적이고 객관적인 지식과, '이야기'로 대표되는 실용적이고 대중적인 어떤 상징으로서의 지식의 영역이 서로를 초월적으로 여행한다 (transgressive travel)고 표현해요.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지도와 같은 이론을 통한 지식의 습득일 수도 있고 (knowing that, knowing about), 어떠한 행위를 통한 것일 수도 있죠 (knowing how, knowing who). 도나 해러웨이는 전자를 "view from above"로, 후자를 "view from a body"로 표현해요. 근대사회에서는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자명한 지식을 의미했고, 경험이나 발화는 지식으로 보지 않았어요. 하지만 현대의 주류 인식론은 보는 것을 통해서 아는 것은 가려지고, 위장되어지고, 직접적이지 않은, 문맥 속에서 내장되고 감춰진 의미를 보여주지 못한다고 주장해요. 이론을 통한 지식은 장소를 초월하는 것처럼 보일 뿐, 정말로 그렇지는 못하다는 것이죠. 

"Subjugated Knowledges have been erased because they are illegible; they exist, by and large, as active bodies of meaning, outside of books, eluding the forces of inscription that would make them legible, and thereby legitimate."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 (Michel Foucault)는 정복된 지식, "subjugated knowledge"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는데요, 모든 위계 질서의 가장 아래쪽에 위치한 local/regional (참 이 단어를 어떻게 한국어로 표현할 수 있는지 의문이네요 ㅠㅠ) 하고 토착적이고 (vernacular), 순수한 (naive) 지식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에요. 과학이라기보다는 옛날 이야기 느낌의, 주류 문화가 무시하고 배제시키고 억압했던 지식의 형태를 의미하는데, 이런 지식은 단순히 주류 사회의 눈으로 읽기가 어렵기 때문에 역사 속에서 지워져왔다고 주장해요. 하층 계급의 사람들 (subordinate people)은 특권 계급과 달리 자유롭게, 투명하고 명백하게, 직접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지 못했어요. 문자를 통해서 전승되는 지식은 하층민들에게 닿지 못했고, 따라서 이들의 제스쳐나 톤, 표현의 조각들은 기록될 수 있는 방법이 적었기 때문이죠. 상류 계급의 highly-educated된 사람들은 텍스트로 표현될 수 있는 지식 외에도 더 창조적이고 intelligent한 형태의 지식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데 실패해요. 드와이트는 이런 문자중심사회를 비판하며 퍼포먼스학은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주장하죠.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텍스트는 control, displacement, threatening이라는 단어들로 인식돼요. 일례로 미국 사회에서 가장 하층민이라고 볼 수 있는 불법 이민자들 (undocumented immigrants)만 해도 텍스트화된 서류가 없기 때문에 사회에서 배제돼죠. 이렇게 인간 지식의 상당 부분은 서구중심사회, 텍스트중심문화에 의해서 지워져왔어요. (fetish of the archive where "text - a sad proxy for life - becomes all) 예를 들어 아프리카의 가리푸나족 사람들은 상류 계급의 사람들을 "people with pencil", 펜이 있는 사람들, 반대로 노동계층은 '펜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불러요. 이 펜이 계급을 나누는 도구로 작동하면서 텍스트와 펜은 특권을 토대로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지식과 힘을 소유하는 도구로 작동하게 되는 것이죠. 

"Scholars need to move beyond this 'idea and ideology' of the text and of textuality as a mode of communicative practice which provides a model for all other forms of cognitive exchange and social interaction." 

텍스트를 소유하지 못한, 억압받는 계층들은 역사적으로 긴급 상황에서 사회적으로 교류하며 상황을 인식할 수 있는 다른 형태의 소통 모델이 필요했어요. 어떻게 보면 코드화, 암호화된 메세지라고 볼 수 있는데, 프레데릭 더글라스 (Frederick Douglass)라는 학자는 흑인 노예들의 노래라는 예시를 들어 설명해요. 급여를 받는 날이 되면 흑인 노예들은 신이 나서 다 함께 대농장으로 향했는데요, 여기로 가는 길은 매우 험난했기 때문에 월급날이라 기쁜 것과는 별개로 엄청나게 힘들었다고 해요. 이 때 그들은 다함께 노래를 부르면서 이동했었는데, 이 노래가 전달하는 깊은 슬픔과 멜랑꼴리한 황홀감을 듣고 있자면, 노래의 음 하나 하나가 모두 노예제의 증거로 그 어떤 자료보다도 더 강력하게 다가오게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어요. (coperformative witnessing) 

"Knowledge is located, not transcendent. It must be engaged, not abstracted." 

더글라스는 이렇게 사람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에 지식에 오류가 생기는 것이라고 주장해요. 반대로 클리포드 기어츠(Clifford Geertz)라는 학자는 더글라스와 반대 입장인데, 퍼포먼스 행위의 레파토리가 아니라 텍스트의 종합 (ensemble of texts)이 저항의 문화를 만든다는 입장이죠. 저는 개인적으로 더글라스의 주장이 더 설득력있다고 생각하는데요, "Politics was played, danced, and acted, as well as sung about, because words will never be enough to communicate its unsayable claims to truth.", 즉, 반체제 문화의 중심을 이루는 정치는 춤과 놀이, 행위를 통해서 구성되는데, 그 이유는 문자를 통해서는 절대 진실에 근접한 주장을 말하는 것이 충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라고 해석할 수 있겠어요. 

 기어츠는 참여하지 않고 그 현장을 사람들 옆에 서서 지켜보며 그들의 '텍스트'를 읽는 것을 통해 충분히 타자를 기록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동시에 학자의 '알고자 하는 의지 (will-to-know)'를 문제삼지 않아요. 반면 조라 닐 허스턴 (Zora Neal Hurston)은 연구자가 종속된 타자의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그것보다 훨씬 복잡한 행위라고 반박하죠. 텍스트는 저항과 권력 관계의 영역에서 쓰여지고, 읽혀지고, 교환되어졌기 때문에 이렇게 타자를 객관화하고 컨트롤하면서 지식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해요. 타자들은 절대로 그들의 텍스트를 권력 계층에게 그냥 보여주지 않을 거에요. 너희들이 뭔데 알려고해...? 누가 알려줄 줄 알고? 

"He can read my writing but he sho' can't read my mind. I'll put this play toy in his hand, and he will seize it and go away. Then I'll say my say and sing my song." 

제가 너무 재미있게 읽은 구절인데, 어디 한 번 읽어볼테면 읽어봐~ 내가 꽁꽁 숨겨놨으니까ㅎㅎ 대충 읽고 이해한 척 떠나면 그 다음에 우린 바로 재밌게 그걸 가지고 놀아야지~ 메롱~ 약간 이런 느낌? 텍스트는 물론 문제가 아니에요. 다만 텍스트중심주의 (Textocentrism)적인 사고가 문제죠. 또 다른 예시로 어떤 사람이 현관에 "NO TRESPASSING(출입금지)" 이라는 팻말을 세우면 법적으로 고소를 당할 수 없다는 것을 듣고 그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이런 팻말을 자기 현관에다가 설치했는데, 그랬더니 아무도 서로의 집에 방문하지 않아서 결국 모두가 서로에게 아니 사실 그게 아니고... 이러면서 해명을 하러 다녔고, 결국 모든 사람들이 출입금지 팻말이 달린 문 앞에서 서로의 집을 넘나들며 하하호호 했다는... 웃프고 아이러니한 일이... ㅎㅎ... 이건 결국 소통의 창구는 계속 변하고, 계속해서 서로 겹쳐지거나 서로를 관통하거나, 다른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뀔 수 있다는 거겠죠? 간단히 말해 텍스트와 실제 행위는 분리될 수 있다는 것 같아요.

퍼포먼스학은 이런 점에서 여러 다양한 형태의 지식을 모두 다루며 연구하는 학문으로 "a work of imagination"이라고 표현되어요. 노스웨스턴대학교는 퍼포먼스학의 특징을 세 가지로 설명하는데: artistry, analysis, activism. 각각 예술적, 분석적, 행동주의적이라는 단어로 해석할 수 있겠어요. 즉, 1. 예술을 만들고 문화를 재구성하는, doing에서 오는 성취와 2. 예술과 문화를 해석하고 비판적으로 반영하는, 분석적인 행위 3. 사회와 커뮤니티로 뻗어나가 개입하고 행동하는 연결고리로서의 표현 형태. 이렇게 3가지가 퍼포먼스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에게 요구되는 것들이라고 보는 것이죠. (헉...) 

요약하자면, practical knowledge (knowing how)와 proposition knowledge (knowing that), 그리고 political savvy (knowing who, when, and where) 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 퍼포먼스학의 목표라는 것! 

길고 길었네요. 쓰면서 내 머리속에 정리되었길 ^^! 

 

총정리:

터너 - Rituals은 Ceremony와 다르게 아무 것도 없는 상태로 돌아가 새로운 문화를 학습하는 과정인 'Liminality', 'Rites de passage'를 거쳐 한 존재를 변화시키는 행위이다. 

셰크너 - Performance를 특정짓는 가장 큰 특징은 Reformed Behavior이다. 실제 진실/현실과 별개로 전승되고 반복되어질 수 있는 행위를 통해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을 합의 하에 선택하고 행하는 것이 의식이다. 

컨커굿 - 텍스트중심문화는 많은 실질적인 지식들을 역사 속에서 지워버렸다. 소통의 방식과 텍스트는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실제와 분리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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